1. 영광의 시대에서 생존 투쟁으로
한때 중국 시장은 현대자동차와 기아에게 약속의 땅과 같았습니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양사는 합산 180만 대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올리며 시장 점유율 7%를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현대 속도'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가파른 성장세를 구가하며 중국은 명실상부한 최대 시장이자 핵심적인 수익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사이 상황은 급반전되었습니다. 현재 현대차와 기아의 중국 내 입지는 처참할 정도로 쪼그라들었습니다. 판매량은 급전직하했고, 시장 점유율 순위에서는 이름조차 찾기 힘든 수준으로 전락했습니다.
이제 냉정한 질문을 던져야 할 때입니다. 과연 현대차와 기아는 세계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이 거대한 자동차 시장에서 재기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미래는 이제 생존 자체에 초점을 맞춰 틈새시장을 공략하거나 수출 기지로서의 역할에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요? 중국 시장의 규모를 고려할 때 이는 현대차그룹 전체의 글로벌 전략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2.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극적인 붕괴
현대차와 기아의 중국 시장 내 위상은 숫자로 명확히 드러납니다. 한때 양사 합산 점유율이 7%를 상회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최근 몇 년간의 하락세는 가파르다 못해 수직 낙하에 가깝습니다. 2023년 합산 점유율은 약 1.4% 수준까지 떨어졌고, 2024년에는 1% 미만으로 더욱 주저앉았습니다. 구체적인 판매량을 보면 하락세는 더욱 극명합니다. 현대차의 경우 2016년 114만 대 판매라는 정점을 찍었으나, 최근 연간 판매량은 24만~25만 대 수준으로 급감했습니다. 기아 역시 2016년 65만 대 판매 이후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이며 최근에는 연간 10만 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기아차 중국 시장 합산 점유율 추이
연도 | 현대차 점유율(%) | 기아 점유율(%) | 합산 점유율(%) |
~2016 | ~4.5% | ~2.8% | ~7.3% |
2020 | 2.3% | 1.1% | 3.4% |
2021 | 1.8% | 0.6% | 2.4% |
2022 | 1.2% | 0.4% | 1.6% |
2023 | 1.1% | 0.3% | 1.4% |
2024 | 0.6% | 0.3% | 0.9% |
이러한 추락은 점진적인 하락이 아닌, 그야말로 '붕괴'에 가깝습니다. 특히 미국이나 인도 등 다른 주요 시장에서 현대차·기아가 견조한 성장세를 보이거나 선전하고 있는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이는 중국 시장에서의 부진이 특정 지역에 국한된 심각한 문제임을 시사합니다.
3. 위기의 해부: 무엇이 잘못되었나?
현대차·기아의 중국 시장 실패는 단일 요인이 아닌, 복합적인 문제들이 얽혀 발생했습니다.
중국 전기차(EV) 돌풍과 현대·기아의 늦은 대응
중국 자동차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전동화가 진행되는 곳입니다. BYD, 지리, 니오, 샤오펑 등 중국 토종 브랜드들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발 빠른 시장 대응을 통해 전기차(신에너지차, NEV)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특히 BYD는 테슬라를 넘어서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습니다. 중국은 전 세계 전기차 판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시장으로 변모했습니다.

이러한 격변기에 현대차와 기아의 대응은 너무 늦었습니다. 아이오닉 5, EV6 등 글로벌 시장에서 호평받은 전기차 모델들이 있었지만, 중국 시장에는 적시에 투입되지 못했거나 현지 경쟁 모델 대비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중국 소비자들은 뛰어난 기술과 합리적인 가격을 갖춘 자국 브랜드 전기차로 빠르게 눈을 돌렸습니다. 최근 EV5와 같은 현지 전략 모델을 출시하며 뒤늦게 추격에 나섰지만 이미 시장 주도권은 상당 부분 넘어간 상태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경쟁 심화가 아니라 중국 전기차 시장의 전환 속도와 특성(기술 중심, 가격 민감성)을 제대로 예측하고 발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시장이 요구하는 제품을 제때 공급하지 못한 것이 점유율 하락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입니다.
브랜드 이미지의 덫
과거 현대차·기아의 성공 방정식이었던 '가성비'(性价比, xingjiabi) 이미지는 오히려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었습니다. 중국 소비자들의 소득 수준이 향상되고 자동차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면서 단순히 저렴한 차보다는 기술력, 디자인, 브랜드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특히 첨단 기술의 각축장인 전기차 시장에서 '가성비' 이미지는 기술적으로 뒤처진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쉬웠습니다. 현대차그룹 내부에서도 '성가비' 대신 '질가비'(質價比, 품질 대비 가격)를 강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한번 굳어진 이미지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한국 브랜드'라는 꼬리표가 부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2017년 사드(THAAD) 사태 이후 악화된 한중 관계는 중국 소비자들의 반한 감정을 자극했고, 이는 한국 제품 불매 운동으로 이어지며 현대차·기아 판매에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중국 현지 언론인이나 인플루언서들은 제품 품질과 별개로 '한국 차'라는 국가 브랜드 자체가 판매 부진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심 차게 출시한 고급 브랜드 '제네시스'나 고성능 'N' 브랜드 역시 중국 시장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대중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넘어서기 어려웠고, 이미 포화 상태인 고급차 및 고성능차 시장에서 강력한 경쟁자들을 넘어서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시대에 뒤처진 브랜드 이미지와 매력적인 전기차 라인업 부재는 서로 악영향을 미치는 악순환을 만들었습니다. '가성비' 브랜드는 고가의 첨단 전기차를 팔기 어렵고 혁신적인 신차가 부족하니 브랜드 이미지는 개선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불어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한 반한 감정은 현대차·기아가 어떤 제품이나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더라도 그 효과를 제한할 수 있는 강력한 외부 제약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현지화 및 전략적 실패
빠르게 변화하는 중국 소비자들의 취향과 요구(디자인, 첨단 기능, 커넥티비티 등)를 제대로 읽고 제품에 반영하는 현지화 노력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중국 토종 브랜드들이 자국 시장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맞춤형 제품을 쏟아내는 동안 현대차·기아는 글로벌 모델을 일부 수정하는 수준에 그치거나 현지 니즈와 동떨어진 제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또한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여,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미래 전기차 시대를 대비하기보다는 당장의 판매량 확대에만 집중했던 전략 역시 현재의 어려움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4. 반격 개시: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전략
벼랑 끝에 몰린 현대차·기아는 생존과 반등을 위해 다각적인 전략 변화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중국을 글로벌 생산 기지로: 수출 중심 전략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중국 공장을 내수 판매용뿐만 아니라 글로벌 수출 기지로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과거 현대차·기아는 중국 내수 시장을 겨냥해 막대한 생산 능력을 확보했지만, 판매 급감으로 공장 가동률은 크게 떨어졌습니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동남아시아, 호주, 중남미 등 다른 지역으로 수출할 물량을 중국 공장에서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중국 공장의 수출 물량은 급증하는 추세이며, 특히 기아의 옌청 공장은 주요 수출 전진기지로 탈바꿈했습니다. 이는 판매 부진으로 인한 손실을 줄이고 기존 투자 자산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현실적인 선택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내수 시장 점유율 회복에 대한 의지가 약화된 것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한 부분입니다. 수출에 집중하는 것이 당장의 생존에는 도움이 되지만 복잡하고 어려운 내수 시장 재건 노력에서 자원과 관심이 분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지화와 R&D에 대한 과감한 투자
수출 전략과 병행하여 현대차그룹은 중국 시장 재공략을 위한 R&D 투자도 대폭 강화하고 있습니다. 최근 합작 파트너인 베이징자동차(BAIC)와 총 11억 달러 규모의 공동 투자를 결정했으며, 상하이와 옌타이 등에 현지 R&D 센터를 설립하거나 기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중국 시장만을 위한 독자적인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단순히 글로벌 모델을 들여오는 것을 넘어 중국 소비자의 취향과 현지 기술 트렌드를 철저히 반영한 '진짜 현지화 모델'을 만들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현지 전략형 전기차들이 순차적으로 출시될 예정입니다. 또한 소비자 경험(UX) 스튜디오를 마련하여 중국 고객들의 목소리를 제품 개발 초기 단계부터 반영하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규모 R&D 투자는 현대차·기아가 중국 내수 시장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입니다. 이는 단순히 수출 기지로만 남겠다는 전략과는 상반되며, 제품 경쟁력 강화를 통해 시장에서 다시 한번 승부를 보겠다는 고비용, 고위험의 장기적인 베팅으로 해석됩니다.
제품 공세와 전략적 파트너십
새로운 전략 아래 구체적인 제품 출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중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EV5, 현지 전용 SUV 무파사 등이 출시되었고, 앞으로 더 많은 현지 맞춤형 전기차가 나올 예정입니다. 동시에 고성능 전기차 아이오닉 5 N 등을 선보이며 브랜드 이미지 제고 노력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비효율적인 내연기관 모델 라인업은 과감히 정리하여 전기차와 중대형 프리미엄 모델에 자원을 집중하는 모습입니다.
또한 현지 기업과의 협력도 강화하고 있습니다. 세계 1위 배터리 기업인 CATL과 협력하여 배터리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고 현지 전동화 경쟁력을 높이는 한편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썬더소프트)이나 자율주행 기술(젠즈 로보틱스) 분야에서도 중국 기업들과 손을 잡고 있습니다. 한때 합작 파트너의 전기차 브랜드(아크폭스) 모델을 위탁 생산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던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중국의 발전된 전기차 생태계 내에서 효과적으로 경쟁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역량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현지 파트너들의 강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반영합니다.
5. 앞으로의 길: 생존과 성장의 전망
현대차·기아 앞에는 여전히 험난한 길이 놓여있습니다. 중국 자동차 시장은 BYD를 필두로 한 강력한 로컬 플레이어들이 치열한 가격 경쟁을 벌이는 '레드 오션'입니다. 앞서 언급한 지정학적 리스크와 부정적인 브랜드 이미지 문제 역시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과거와 같은 높은 시장 점유율(5% 이상)을 회복하는 것은 가까운 미래에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가능한 시나리오는 무엇일까요?
첫째, 현재의 수출 중심 전략을 유지하며 내수 시장에서는 특정 세그먼트에 집중하는 '틈새 플레이어'로 생존하는 방안입니다. 둘째, 막대한 투자를 쏟아붓고 있는 현지화 전략이 성공을 거두어 새롭게 출시될 중국 전용 전기차들이 시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으며 점진적으로 판매와 인지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길고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며, 신차의 성공 여부에 모든 것이 달려있습니다. 셋째,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규모와 경험을 현지화 전략과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글로벌 품질 관리 시스템이나 생산 효율성을 중국 시장에 맞게 적용하는 방식입니다.
지금의 상황으로 볼 때 현재 진행 중인 투자와 수출 전략을 고려하면 '생존' 자체는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의미 있는 수준의 '부활', 즉 시장 점유율의 실질적인 회복은 매우 불확실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새로운 현지화 전기차 전략의 성공 여부와 브랜드 및 정치적 난관 극복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BYD와 같은 강력한 경쟁자들의 존재와 급변하는 시장 환경은 이 과제를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더욱이 중국 브랜드들이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시장으로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는 점은 현대차·기아에게 또 다른 차원의 경쟁 압박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제 현대차·기아에게 중국 시장에서의 '성공'은 과거와 다른 의미를 가질지도 모릅니다. 높은 시장 점유율보다는 중국 시장을 글로벌 전략의 일부(수출 기지, R&D 학습장)로 활용하면서 수익성 있는 제한적인 내수 판매를 유지하는 것이 새로운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막대한 투자는 분명 그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기대치를 조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6. 미궁 속 길 찾기
현대차와 기아는 중국 시장에서 극적인 추락을 경험했습니다. 이는 전기차 전환 지연, 시대에 뒤처진 브랜드 이미지, 치열한 현지 경쟁, 지정학적 악재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이에 대응하여 양사는 중국 공장을 수출 기지로 활용하는 동시에 막대한 R&D 투자를 통해 현지 맞춤형 전기차 개발에 사활을 거는 이중 전략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지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강화하며 생태계 적응력을 높이려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길은 불확실성과 도전으로 가득합니다. 강력한 로컬 경쟁자들과 쉽사리 바뀌지 않는 브랜드 이미지 속에서 현대차·기아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생존은 가능하겠지만 진정한 부활은 현지화 전략이라는 고위험 투자의 성공에 달려 있습니다. 현대차와 기아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용의 미궁 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적응력과 회복탄력성, 그리고 어쩌면 성공에 대한 재정의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이 시장에서 그들의 미래를 결정할 것입니다.
중국 전기차 시장 질주와 K-배터리의 도전 : 격화되는 경쟁 속 생존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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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대한 전환의 서막글로벌 자동차 산업은 전례 없는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내연기관의 시대가 저물고 전기 동력화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특히 중국 시장은 이 거대한 전환의 중심축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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